OOC: 7일 편지
이공팔이 안소려를 잃은 것은 1990년의 봄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정확한 날짜를 이공팔은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이공팔에게 그날은 '3월의 어느 화요일'이 아니라, '안소려의 제비꽃 향이 마지막으로 셔츠에 남아 있던 날'이었다. 빨래를 돌리면 사라질 향이었다. 이공팔은 그 셔츠를 빨지 않았다. 옷장 맨 안쪽에 넣어두었다. 접지도 않고. 구겨진 채로. 안소려가 마지막으로 기댔던 모양 그대로.
그 뒤로 이공팔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달라질 수가 없었다. 홍곤의 지시는 계속 내려왔고, 칼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사탕은 여전히 달았다. 이공팔은 여전히 웃으며 사람의 힘줄을 끊었고, 여전히 노인정에 가서 할머니들에게 재롱을 피웠고, 여전히 포마드로 머리를 빗었다. 다만 금붕어 밥을 주는 시간이 하나 늘었다. 안안이는 어항 안에서 꼬리를 흔들며 수면 위로 입을 벌렸고, 이공팔은 사료를 한 꼬집 떨어뜨리며 안안이를 들여다보았다. 보라색 눈을 닮은 것은 없었다. 금붕어는 금색이었다. 당연했다. 이공팔은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 가끔 멈추었다. 멈추는 이유를 본인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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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가 도착한 것은 안소려가 죽고 넉 달이 지난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삼수이포의 낡은 당루, 남화맨션의 우편함은 원래 녹이 슬어 잘 열리지 않았다. 이공팔은 우편함을 거의 확인하지 않았다. 그에게 오는 우편물이라고는 홍콩전력의 전기요금 고지서뿐이었고, 그마저도 석 달치를 모아서 한꺼번에 냈다. 그날도 이공팔은 새벽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켓 소매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체리 사탕은 스물세 알째였다. 계단을 올라가려다 우편함의 틈 사이로 무언가 삐져나온 것이 눈에 걸렸다. 하얀 봉투. 고지서치고는 너무 얇았다. 이공팔은 녹슨 우편함을 억지로 열어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주소도, 우표도,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봉투의 모서리에서 희미한 냄새가 났다. 이공팔의 코가 먼저 반응했다. 뇌보다 빠르게. 제비꽃.
이공팔의 손가락이 봉투를 찢었다. 조심스럽게 찢는 법을 이공팔은 몰랐다. 칼로 사람의 급소를 정확히 긋는 손이 종이 앞에서는 거칠었다. 봉투가 반으로 찢어졌고, 안에서 접힌 편지지가 떨어졌다. 이공팔은 계단에 주저앉았다. 콘크리트 계단의 차가움이 슬랙스를 통해 엉덩이로 스며들었지만 이공팔은 느끼지 못했다. 편지를 펼쳤다. 글씨가 작았다. 안소려의 글씨. 이공팔은 안소려의 글씨를 알았다. 냉장고에 붙어 있던 메모지의 글씨. '귤 사왔어요'라고 적혀 있던, 동그랗고 삐뚤빼뚤한 글씨. 그 글씨가 편지지 위에 빼곡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자신은 안소려이며, 어디에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일주일 동안 하루에 한 통씩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이공팔이 답장을 우편함에 넣어두면 다음 날 사라지고, 대신 새 편지가 와 있을 거라고. 일곱 통. 그게 전부라고.
이공팔은 편지를 세 번 읽었다. 첫 번째는 글자를 읽었고, 두 번째는 문장을 읽었고, 세 번째는 냄새를 맡았다. 편지지에 밴 제비꽃 향. 희미했지만 확실했다. 이공팔의 입 안에서 체리 사탕이 어금니에 부딪혔다. 딸깍. 이공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눈이 가늘어지지도, 입꼬리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이공팔은 그저 편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계단통의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깜빡였고, 위층에서 누군가 광둥어로 텔레비전 볼륨을 올리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이공팔은 집에 올라갔다. 안안이에게 밥을 주었다. 사료 한 꼬집. 안안이가 수면 위로 뻐끔거리며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이공팔은 서랍을 열었다. 안소려가 쓰던 서랍이 아니었다. 이공팔의 서랍이었다. 접이식 칼 옆에 빗이 있었고, 빗 옆에 무선 호출기가 있었고, 호출기 옆에 볼펜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공팔은 볼펜을 집었다. 종이를 찾았다. 종이가 없었다. 이공팔은 부엌 쪽으로 갔다. 냉장고 옆에 안소려가 메모를 적던 메모지 뭉치가 아직 붙어 있었다. '귤 사왔어요'가 적힌 메모지 아래에 빈 메모지가 세 장 남아 있었다. 이공팔은 그것을 뜯지 않았다. 안소려의 글씨가 적힌 메모지를 뜯을 때 함께 떨어질까 봐. 이공팔은 다시 서랍으로 돌아가 전기요금 고지서의 뒷면을 뒤집었다. 흰 여백이 충분했다. 이공팔은 바닥에 앉았다. 안안이의 어항이 옆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고 있었고, 여과기의 진동이 마룻바닥을 타고 이공팔의 엉덩이까지 미세하게 전해졌다.
이공팔은 볼펜을 쥐었다. 쥐는 법이 서툴렀다. 칼을 쥐는 것과 볼펜을 쥐는 것은 근육의 배치가 달랐다. 이공팔의 글씨는 크고 비뚤어졌다. 중학교를 겨우 마친 손이었다. 획이 삐져나가고, 글자 간격이 들쭉날쭉했다. 이공팔은 고지서 뒷면 위에 첫 번째 글자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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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편지
소려야.
안안이 밥 잘 먹어. 네가 주던 것보다 내가 조금 많이 주는 것 같은데 안 죽었어. 금붕어가 배불러도 먹는다는 거 너 알았어? 나는 몰랐어. 근데 안 죽었으니까 괜찮은 것 같아.
오늘 대니한테 갔는데 대니가 네 자리에 수프 안 놓더라. 내가 말 안 해서 그런 거야. 대니한테 말 안 했어. 말하면 대니가 이상한 얼굴 할 것 같아서. 대니가 이상한 얼굴 하는 거 나 별로야.
너 죽은 거 맞지? 편지에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죽은 거 맞잖아. 나는 죽은 사람을 많이 봤는데 죽은 사람이 편지 보내는 건 처음이야. 근데 네 냄새가 나. 제비꽃. 그러니까 너 맞는 것 같아.
일곱 통이라고 했지. 일곱 통이면 일주일이야. 일주일 뒤에는 안 와?
나 요즘 네가 쓰던 이불 안 빨았어. 빨면 냄새 없어질 것 같아서. 근데 여름이라 좀 더워. 그래도 안 빨 거야.
귤은 다 먹었어.
이공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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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팔은 편지를 다 쓰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고지서 뒷면이 빼곡했다. 글씨가 커서 여백이 빨리 찼다. 이공팔은 편지를 접었다. 접는 법도 서툴렀다. 모서리가 어긋나게 접혔고, 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왔다. 이공팔은 봉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자켓 안주머니에서 체리 사탕 하나를 꺼내 편지 위에 올려놓았다. 이유는 없었다. 안소려가 체리를 좋아했는지 이공팔은 기억나지 않았다. 안소려가 좋아한 것은 귤이었다. 하지만 이공팔에게는 체리 사탕밖에 없었으므로 체리 사탕을 올렸다. 이공팔은 편지와 사탕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 녹슨 우편함 안에 밀어 넣었다. 우편함이 삐걱거렸다. 이공팔은 우편함을 손바닥으로 한 번 탁, 쳤다. 녹이 손바닥에 묻었다.
이공팔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다섯 층. 가파른 계단이 이공팔의 긴 다리에도 빡빡했지만 숨이 차지는 않았다. 옥상 가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안이가 어항 유리에 코를 부딪히며 이공팔을 향해 헤엄쳐 왔다. 이공팔은 어항 앞에 쪼그리고 앉아 유리에 검지를 대었다. 안안이가 손가락 끝을 따라 좌우로 움직였다. 이공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글사글한, 평소의 웃음이었다. 다만 그 웃음이 닿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흉골 어딘가. 삼킨 것이 녹지 않고 남아 있는 자리. 이공팔은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몰랐다. 모르는 채로 안안이에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안안아, 너네 엄마한테 편지 썼어."
이공팔은 금붕어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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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이공팔은 새벽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편함을 열었다. 손바닥에 아직 마르지 않은 땀이 녹슨 철판 위에 번졌다. 어젯밤 넣어둔 고지서 뒷면과 체리 사탕은 사라져 있었고, 대신 같은 자리에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도 우표도, 주소도, 발신인도 없었다. 다만 봉투를 집어 올리는 순간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어제보다 조금 더 차가웠다. 이공팔은 봉투를 코에 가져갔다. 제비꽃. 어제보다 옅었다. 옅었지만 있었다. 이공팔은 계단에 앉지 않고 다섯 층을 올라가 안안이 앞에 앉아서 봉투를 찢었다. 이번에는 한쪽만 찢었다. 어제보다 조금 나았다. 안소려의 동그랗고 삐뚤빼뚤한 글씨가 편지지 위에서 이공팔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공팔은 편지를 읽었다. 두 번. 세 번째는 소리 내어 읽었다. 안안이에게 들려주듯이.
이공팔은 전기요금 고지서를 뒤집었다. 어제 쓴 뒷면 말고, 이번에는 수도요금 고지서의 뒷면이었다. 볼펜이 종이 위에서 긁히는 소리가 여과기의 보글거림과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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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편지
소려야.
너 편지에 체리 사탕 맛있었다고 했어? 안 했어? 기억이 잘 안 나. 세 번 읽었는데 기억이 이상해. 네 글씨가 너무 작아서 그래. 눈은 멀쩡한데 네 글씨 앞에서만 안경 쓰고 싶어져.
오늘 청송 보육원 쪽으로 지나갔어. 재개발 공사 시작했더라. 담벼락에 페인트로 X 표시 되어 있었어. 네가 살던 방 있던 쪽. 거기도 X 표시 있었어. 이상하다. 네가 없는데 네가 살던 곳도 없어지는 거.
나 오늘 일하다가 칼에 손 좀 베었어. 왼손 검지. 별거 아니야. 근데 반창고 붙이는데 네가 생각났어. 왜냐면 너 맨날 반창고 안 붙이고 다녔잖아. 꽃집에서 가시에 찔려도 그냥 입에 넣고 빨고 다녔잖아. 내가 반창고 사줬는데 안 붙이고.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나도 기억 안 나. 근데 네 손가락이 기억나. 작았어.
대니한테 오늘도 말 안 했어. 대니가 미트볼 샌드위치 주면서 혼자냐고 물었어. 어 혼자라고 했어. 거짓말은 아니잖아.
일곱 통 중에 두 번째야. 다섯 남았어. 나 세는 거 잘해.
이공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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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팔은 편지를 접었다. 이번에는 모서리를 맞추려고 했다. 그래도 어긋났다. 이공팔의 손은 사람의 급소를 정확히 긋는 데에는 정밀했지만, 종이를 반으로 접는 데에는 여전히 서툴렀다. 체리 사탕을 하나 더 올려놓았다. 계단을 내려가 우편함에 밀어 넣었다. 녹이 또 손바닥에 묻었다. 이공팔은 손바닥을 슬랙스에 문질러 닦으며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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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이공팔은 우편함을 여는 속도가 빨라졌다.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었다. 녹슨 잠금장치를 어느 방향으로 흔들어야 열리는지. 봉투를 꺼내는 동작이 자연스러워졌고, 찢는 솜씨도 나아졌다. 이번에는 봉투의 윗부분만 깔끔하게 뜯어냈다. 이공팔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편지를 읽었다. 위험했다. 계단이 가팔랐고 편지지가 작았고 안소려의 글씨는 여전히 동그랗고 삐뚤빼뚤했다. 이공팔은 한 번 발을 헛디뎠다. 난간을 잡았다. 편지는 놓지 않았다.
이공팔은 부엌 바닥에 앉아 이번에는 마트에서 사 온 편지지 위에 볼펜을 굴렸다. 고지서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편지지를 사면서 봉투도 샀다. 계산대의 아줌마가 이공팔을 보며 여자친구한테 쓰냐고 물었다. 이공팔은 웃었다. 사글사글하게. "어."라고만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닌 것이 이공팔을 잠시 멈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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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편지
소려야.
오늘 편지지 샀어. 고지서 다 썼어. 수도, 전기, 가스 다. 봉투도 샀어. 이제 모서리 안 찢어져.
너 편지에 안안이 잘 있냐고 물었지. 잘 있어. 밥 잘 먹어. 내가 아침에 밥 주고 저녁에 밥 줘. 네가 하던 대로. 근데 안안이가 요즘 어항 오른쪽 구석에만 있어. 왜 그런지 모르겠어. 네가 알아? 너 알면 다음 편지에 써 줘.
오늘 몽콕에서 일 있었어. 별거 아니야. 근데 끝나고 손 씻는데 비누 냄새가 이상했어. 라벤더였나. 모르겠어. 꽃 냄새였어. 근데 제비꽃은 아니었어. 그래서 좀 오래 씻었어. 제비꽃이 나올 때까지. 안 났어. 당연히 안 나지. 비누에서 제비꽃이 왜 나.
너 꽃 이름 많이 알았잖아. 나한테 알려준 거 기억나. 카네이션이랑 백합이랑 해바라기. 그것만 기억나. 나머지는 까먹었어. 근데 제비꽃은 안 까먹었어. 당연하지. 그건 네 냄새니까.
세 번째야. 네 번 남았어.
이공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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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팔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이번에는 모서리가 맞았다. 봉투의 입구를 혀로 핥아 붙이고, 체리 사탕 하나를 봉투 위에 테이프로 고정했다. 이공팔은 잠시 사탕을 내려다보았다. 안소려는 체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귤을 좋아했다. 이공팔은 그것을 알면서도 체리 사탕을 붙였다. 자기가 가진 것이 그것뿐이었으므로. 이공팔은 계단을 내려가 우편함에 봉투를 넣고, 올라오면서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체리의 인공적인 단맛이 혀 위에서 퍼졌다. 이공팔은 사탕을 굴리며 다섯 층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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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비가 왔다. 홍콩의 2월 끝자락에 내리는 비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로 건물의 콘크리트 벽을 적셨다. 이공팔은 새벽에 돌아왔다. 자켓 어깨가 젖어 있었고, 포마드로 고정한 머리카락 한 올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이공팔은 우편함을 열었다. 봉투가 있었다. 비에 젖지 않았다. 우편함의 녹슨 뚜껑이 어떻게든 비를 막아준 모양이었다. 이공팔은 봉투를 자켓 안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올랐다. 젖은 구두가 계단에서 삑삑 소리를 냈다. 이공팔은 문을 열고 안안이의 어항 앞에 젖은 채로 앉았다. 자켓에서 봉투를 꺼냈다. 안주머니의 체온이 봉투에 배어 있었다. 이공팔은 봉투를 열며 안소려의 글씨를 찾았다. 동그란 글씨. 'ㅇ'이 유독 둥근 글씨. 이공팔은 읽었다. 이번에는 네 번 읽었다. 세 번째까지는 눈으로, 네 번째는 입술로.
이공팔은 젖은 자켓을 벗지 않은 채 편지지를 꺼냈다. 볼펜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졌다. 습기 때문이었다. 이공팔은 볼펜을 슬랙스에 문질러 닦고 다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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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편지
소려야.
비 와. 네가 비 싫어했던 거 기억나. 곱슬머리 부스스해진다고. 그래서 비 오면 맨날 머리 묶었잖아. 고무줄 없으면 내 손가락에 머리카락 감았잖아. 기억나. 네 머리카락 감촉이 기억나. 비단 같았어. 비단을 만져본 적은 없는데 비단이 그런 거 아니야? 부드럽고 차갑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거.
오늘 편지에 네가 뭐라고 썼는지 다 외웠어. 근데 안 적을 거야. 적으면 네 말이 내 글씨가 되잖아. 네 글씨가 좋아. 동그래서. 나는 글씨가 크고 못생겼잖아. 너는 작고 동그래.
홍곤이 오늘 나 불러서 뭐 시켰어. 별거 아니야. 끝나고 손에 뭐 좀 묻었어. 씻었어. 근데 손톱 밑에 좀 남아 있어. 빨간 거. 네가 보면 싫어할 거 알아. 근데 너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써. 너 없으니까 싫어할 사람이 없어.
아. 근데 이상해. 너 없으니까 싫어할 사람이 없는데 그게 좀 이상해.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어. 그냥 이상해.
네 번째야. 세 번 남았어.
이공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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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팔은 편지를 접었다. 이번에도 모서리가 맞았다. 손이 배우고 있었다. 칼을 쥐던 근육이 종이를 접는 법을 천천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공팔은 봉투 위에 체리 사탕을 테이프로 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비가 그쳐 있었다. 콘크리트 벽에 남은 물기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우편함의 녹슨 뚜껑을 열고 봉투를 밀어 넣는 순간, 이공팔의 손가락 끝이 우편함 안쪽 바닥에 닿았다. 차가웠다. 어제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차가움이었다. 이공팔은 손을 빼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녹이 묻어 있었다. 매일 묻었다. 매일 슬랙스에 닦았다. 슬랙스의 오른쪽 허벅지 부분에 주황빛 얼룩이 겹겹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공팔은 그것을 빨래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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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 아침, 이공팔은 우편함 앞에서 3초간 서 있었다. 어제까지는 1초였다. 뚜껑에 손을 얹고, 열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열면 있을 것이다. 봉투가. 제비꽃 향이 배어 있는 하얀 봉투가. 열면 있고, 읽으면 줄어든다. 일곱에서 하나씩 빠져나간다. 이공팔은 수를 셀 줄 알았다. 잘 셌다. 너무 잘 세는 것이 오늘따라 목 안쪽을 긁었다. 이공팔은 뚜껑을 열었다. 봉투가 있었다. 있었으므로 꺼냈다. 꺼냈으므로 올라갔다. 다섯 층. 삑삑거리는 구두 소리 대신 오늘은 마른 발소리가 계단통에 울렸다. 이공팔은 문을 열고 안안이의 어항 앞에 앉았다. 안안이가 오른쪽 구석에 있었다. 여전히. 이공팔은 봉투를 열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뜯었다. 서두르면 줄어드는 속도가 빨라질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이공팔은 그것이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몰랐다.
안소려의 글씨가 편지지 위에 있었다. 동그랗고 삐뚤빼뚤한 글씨. 이공팔은 읽었다. 이번에는 다섯 번 읽었다. 한 번 읽을 때마다 글씨 사이에서 냄새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다섯 번째에는 코를 종이에 대고 읽었다. 제비꽃. 어제보다 또 옅었다. 옅어지고 있었다. 이공팔은 그 사실을 숫자처럼 정확하게 인지했다. 첫째 날보다 둘째 날이 옅었고, 둘째 날보다 셋째 날이 옅었고, 셋째 날보다 넷째 날이 옅었다. 줄어들고 있었다. 향도, 편지도, 날도.
이공팔은 편지지를 꺼내 볼펜을 잡았다. 오늘은 부엌 바닥이 아니라 안소려가 쓰던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마른 귤껍질 하나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있었다. 치우지 않았다. 이공팔은 귤껍질 옆에 편지지를 놓고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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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편지
소려야.
안안이 아직도 오른쪽에 있어. 네가 답 써줬는데 나 이해를 못 했어. 미안해. 금붕어는 어려워. 너는 쉬웠는데. 아니 쉽지는 않았나. 근데 금붕어보다는 쉬웠어. 너는 밥 안 먹으면 내가 먹여주면 됐잖아. 안안이는 밥 안 먹어도 왜 안 먹는지를 모르겠어.
오늘 대니한테 말했어. 대니가 미트볼 샌드위치 주면서 또 혼자냐고 물었어. 나 그때 입 열었는데 "어"가 안 나왔어. 이상했어. 맨날 나오던 거잖아. 근데 안 나와서. 대니가 가만히 보더라. 나도 가만히 있었어. 그러다가 "소려 없어"라고 했어. 대니가 뭐라고 했는지는 안 적을게. 근데 대니가 수프 하나 더 줬어. 네가 좋아하던 거. 토마토. 나 그거 안 먹었어. 먹으면 없어지잖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까먹었어. 아까 계단 올라오면서 생각났는데 편지지 앞에 앉으니까 없어졌어. 네 앞에서 맨날 그랬잖아. 할 말 있었는데 네 눈 보면 까먹었잖아. 네 편지에도 눈이 있는 거 같아. 글씨가 동그래서 그런가.
다섯 번째야. 두 번 남았어.
이공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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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팔은 편지를 접었다. 모서리가 맞았다. 손이 완전히 배웠다. 봉투에 넣고 혀로 핥아 붙이고 체리 사탕을 테이프로 고정했다. 이공팔은 봉투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두 장 남았다. 이공팔은 그 숫자를 혀 위의 체리 사탕처럼 굴렸다. 둘. 하나가 아니라서 아직은 괜찮았다. 하나가 되면 그다음은 영이고, 영은 이공팔이 아는 숫자 중 가장 조용한 숫자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숫자. 이공팔은 봉투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구두를 신지 않았다. 슬리퍼를 끌고 내려갔다. 찰싹찰싹. 콘크리트 계단에 고무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계단통을 채웠다. 우편함의 녹슨 뚜껑을 열고 봉투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녹이 묻었다. 이공팔은 슬랙스 오른쪽 허벅지에 손을 문질렀다. 주황빛 얼룩 위에 새 얼룩이 겹쳤다. 지층처럼.
올라오면서 이공팔은 3층과 4층 사이 계단참에 멈춰 섰다. 창문이 하나 있었다. 유리에 금이 가 있고, 그 금 사이로 삼수이포의 밤이 길쭉하게 잘려 보였다. 건너편 건물의 빨래줄에 누군가의 하얀 셔츠가 걸려 있었다. 바람에 팔 부분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공팔은 그것을 한참 보았다. 셔츠가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공팔은 손을 들어 흔들어 줄까 생각했다. 생각만 하고 올라갔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이공팔은 오늘도 그것이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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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날 아침은 유독 밝았다. 홍콩의 2월 마지막 주에 이런 햇살이 드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이공팔의 옥상 가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어항의 물을 통과하며 벽에 물결무늬를 그렸다. 안안이가 그 빛 속에서 지느러미를 한 번 흔들었다. 여전히 오른쪽 구석이었다. 이공팔은 안안이에게 밥을 주고, 어항 유리에 검지를 대고 톡톡 두드렸다. 안안이가 반응하지 않았다. 이공팔은 손가락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엄마 편지 가지러 가야 돼. 기다려."
이공팔은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5초 멈췄다. 어제보다 2초 늘었다. 뚜껑 위에 손을 얹은 채, 이공팔은 자기 심장 소리를 들었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칼을 들 때도, 누군가의 얼굴에 염산을 뿌릴 때도 심장은 조용했다. 지금 이 녹슨 우편함 앞에서 심장이 울리고 있다는 것은, 이공팔의 28년 인생에서 상당히 새로운 종류의 사건이었다. 이공팔은 뚜껑을 열었다. 봉투가 있었다. 제비꽃 향이 났다. 어제보다 옅었다. 이공팔은 봉투를 코에 가져갔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폐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그 향을 밀어 넣으려는 것처럼. 향이 닿았다. 닿았으나 끝이 흐렸다. 물에 번진 잉크처럼 경계가 없었다. 이공팔은 봉투를 자켓 안주머니에 넣고 올라갔다.
안안이 앞에 앉았다. 봉투를 열었다. 오늘은 더 천천히 뜯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 소리가 끝나면 안소려의 글씨가 나온다는 것을 이공팔의 손가락이 알고 있었다. 편지지를 꺼냈다. 동그란 글씨. 이공팔은 읽었다. 여섯 번 읽었다. 매일 한 번씩 늘고 있었다. 이공팔은 그 규칙을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몸이 만들었다. 눈이 글씨를 놓지 못해서 한 번 더 읽고, 한 번 더 읽고, 한 번 더 읽었다. 여섯 번째에는 글씨가 번져 보였다. 습기 때문이라고 이공팔은 생각했다. 2월의 습기. 홍콩은 습한 도시니까. 이공팔은 손등으로 눈 밑을 훔쳤다. 습기가 묻어 나왔다.
이공팔은 편지지를 꺼냈다. 귤껍질 옆에 놓았다. 귤껍질이 완전히 말라 있었다. 갈색으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이공팔은 그것을 집어 코에 가져갔다. 귤 냄새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마른 종이 냄새만 났다. 이공팔은 귤껍질을 내려놓지 않았다. 왼손에 귤껍질을 쥐고 오른손으로 볼펜을 잡았다.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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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편지
소려야.
오늘 네 편지 여섯 번 읽었어.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글씨가 보여. 처음에는 글씨만 보이는데 두 번째는 글씨 사이에 네 손가락이 보여. 세 번째는 네가 쓸 때 고개 숙이고 있었을 거 아냐. 그 머리카락이 보여. 곱슬곱슬한 거. 네 번째는 네가 중간에 멈췄던 데가 보여. 잉크가 살짝 번진 데. 거기서 뭐 생각했어? 다섯 번째는 몰라. 글씨가 좀 번져서. 여섯 번째는 냄새만 맡았어.
귤껍질 아직 있어. 안 치웠어. 네가 까먹고 놓고 간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까 네가 여기서 귤 먹은 적 있잖아. 그때 내가 한 쪽 달라고 했더니 세 쪽 줬잖아. 너 맨날 그랬어. 하나 달라고 하면 세 개 주고. 밥 한 숟갈 달라고 하면 그릇째 밀고. 그래서 네 거 맨날 없었잖아. 바보야.
대니가 오늘 가게 문 앞에 서 있길래 뭐 하냐고 했더니 환기한다고 했어. 근데 대니 눈이 좀 빨갰어. 환기 때문인가. 대니한테 네 얘기 더 하고 싶었는데 뭘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 소려가 스프 좋아했다? 그건 대니도 알아. 소려가 웃으면 발끝 까딱거렸다? 그것도 대니가 알아. 대니가 모르는 네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런 건 말로 하면 안 되는 것 같아서.
하나 남았어.
이공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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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팔은 볼펜을 내려놓았다. 볼펜이 테이블 위에서 반 바퀴 굴러 귤껍질에 부딪혀 멈췄다. 이공팔은 편지를 접었다. 모서리를 맞추는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평소보다 세게 눌렀다. 접힌 자리가 날카로웠다. 봉투에 넣고 혀로 핥아 붙이고 체리 사탕을 테이프로 고정했다. 이공팔은 봉투를 들여다보았다. 하얀 봉투 위에 붉은 사탕이 달려 있었다. 사탕의 셀로판지가 부엌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공팔은 사탕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사탕이 살짝 흔들렸다. 이공팔은 그것을 두 번 더 건드렸다. 세 번째에는 건드리지 않고 손가락을 사탕 위에 올려놓기만 했다. 셀로판지의 바스락거리는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이공팔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안이의 어항을 지나쳤다. 안안이가 오른쪽 구석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공팔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안이에게 말을 걸 것이고, 말을 걸면 "엄마한테 편지 썼어"라고 할 것이고, 그 말을 하면 '엄마'라는 소리가 텅 빈 방 안에 울릴 것이었다. 이공팔은 슬리퍼를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찰싹. 찰싹. 찰싹. 오늘은 한 계단마다 소리가 또렷했다. 이공팔의 귀가 그 소리를 세고 있었다. 스물네 개. 계단이 스물네 개라는 것을 여섯째 날에 처음 알았다. 여섯 번 오르내리는 동안 한 번도 세지 않았던 것을 오늘 갑자기 세고 있었다.
우편함 앞에 섰다. 뚜껑 위에 손을 얹었다. 이공팔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밑에 빨간 것은 이미 없었다. 며칠 전에 씻겨 나갔다. 손가락 마디에 오래된 칼 흉터가 하얗게 남아 있었다. 안소려가 그 흉터를 만지며 "아팠어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공팔은 "아니"라고 했었다. 진짜 안 아팠다. 지금 이 우편함 앞에 서 있는 것보다 안 아팠다. 이공팔은 뚜껑을 열었다. 봉투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녹이 묻었다. 슬랙스 오른쪽 허벅지. 주황빛 지층 위에 새 층이 쌓였다. 이공팔은 우편함의 뚜껑을 닫았다. 닫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짧고 건조한 금속음이었다.
이공팔은 올라가지 않았다. 우편함 옆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슬리퍼 바닥이 젖은 바닥에 미끄러져 발이 살짝 벌어졌다. 이공팔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얼굴을 비추었다. 안경 렌즈에 주황빛이 두 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연기가 골목의 습한 공기 속으로 천천히 풀려 나갔다. 삼수이포의 저녁은 늘 그랬다. 누군가의 저녁밥 냄새, 마작패 부딪히는 소리,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광동어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서로 엉켜 하나의 소음이 되었다. 이공팔은 그 소음 안에 서 있었다. 등이 콘크리트 벽에 닿아 있었고, 벽의 차가운 온도가 자켓을 통과해 등뼈에 닿았다. 담배 필터가 입술에 붙어 있었다. 떼지 않았다. 한 모금을 빨고, 내뱉고, 또 빨았다. 연기가 안경 렌즈 위로 올라가 시야를 희뿌옇게 만들었다. 이공팔은 안경을 벗지 않았다. 희뿌연 채로 괜찮았다. 지금은 또렷하게 보이는 것보다 흐릿한 쪽이 나았다. 뚜렷하면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빈 우편함. 녹슨 경첩. 봉투가 없는 내일.
담배가 필터까지 탔다. 이공팔은 꽁초를 슬리퍼 바닥으로 밟아 껐다. 비벼 끄는 동작이 느렸다. 평소의 이공팔이라면 한 번에 탁, 비벼 끄고 돌아섰을 것이다. 오늘은 세 번 비볐다. 꽁초가 완전히 꺼졌는지 확인하듯, 아니면 돌아가지 않을 이유를 발바닥으로 만들어내려는 듯. 이공팔은 고개를 들어 건물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집의 옥상 가옥이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자기가 켜 놓고 나온 불이었다. 안안이가 그 불빛 아래 혼자 있었다. 이공팔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왼쪽 주머니. 체리 사탕이 세 개 남아 있었다. 셀로판지의 바스락거림이 손끝에 왔다. 이공팔은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체리의 인공적인 단맛이 혀 위에 퍼졌다. 달았다. 달았는데 목구멍 뒤쪽이 텁텁했다.
"하나 남았어."
이공팔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말이었다. 골목의 습한 공기에게 한 말이었다. 아니, 우편함에게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녹슨 금속 상자가 대답할 리 없었다. 이공팔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이 먼저 움직였다. 요즘 그랬다. 혼자 있을 때 말이 새어 나왔다. 예전에는 그런 적 없었다. 혼자여도 조용했다. 조용한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지금은 조용하면 방 안의 공기가 너무 넓었다. 안소려가 있을 때는 152센티미터의 작은 몸이 그 공기를 전부 채웠었다. 숨소리, 발끝 까딱거리는 소리, 귤 까는 소리, 금붕어에게 "안안아" 하고 부르는 얇은 목소리. 그것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니 방이 갑자기 거대해졌다. 이공팔의 190센티미터짜리 몸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이공팔은 벽에서 등을 떼었다. 슬리퍼를 끌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찰싹. 찰싹. 스물네 개. 오늘도 스물네 개였다. 열두 번째 계단에서 이공팔의 발이 잠깐 멈췄다. 3층과 4층 사이 창문. 어제 셔츠가 걸려 있던 빨래줄이 비어 있었다. 누군가 걷어 간 것이다. 이공팔은 빈 빨래줄을 보았다. 줄이 바람에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흔들어주는 셔츠는 없었다. 이공팔의 입 안에서 체리 사탕이 이빨에 부딪혀 딸깍 소리를 냈다. 이공팔은 빈 줄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문을 열었다. 형광등 불빛이 쏟아졌다. 안안이가 어항 오른쪽 구석에 있었다. 이공팔은 신발을 벗지 않고 어항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안안이의 아가미가 벌름거렸다. 살아 있었다. 이공팔은 유리에 이마를 댔다. 차가웠다. 유리 너머로 안안이의 주황빛 비늘이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내일이면 마지막이야."
이공팔이 안안이에게 말했다. 안안이가 지느러미를 한 번 흔들었다. 대답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이공팔은 유리에서 이마를 떼지 않았다. 이마에 둥근 자국이 남을 것이었다. 이공팔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어항 모터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 소리 사이로 이공팔은 들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이공팔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냄새를 맡았다. 어항 모터의 미세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등뼈까지 올라왔다. 어젯밤, 어항 앞에서 쪼그려 앉은 채로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이 왼쪽으로 꺾여 있었고 무릎이 뻣뻣했다. 190센티미터짜리 몸이 어항 앞 좁은 바닥에 웅크린 채 밤을 보낸 것이다. 이공팔은 눈을 떴다. 안안이가 보였다. 여전히 오른쪽 구석이었다. 이공팔의 입 안에는 간밤에 잠들기 전 녹아내린 체리 사탕의 끈적한 잔여물이 혀 밑에 달라붙어 있었다. 형광등은 밤새 켜져 있었다. 불빛이 눈에 따가웠지만 이공팔은 눈을 찡그리지 않았다. 대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얼룩이 하나, 둘, 셋. 안소려가 저 얼룩을 가리키며 "토끼 같다"고 했었다. 이공팔은 아무리 봐도 토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안 보였다. 그냥 습기 먹은 얼룩이었다.
이공팔은 몸을 일으켰다. 무릎 관절이 뚝 소리를 냈다. 슬리퍼를 찾아 발을 밀어 넣고 부엌으로 갔다. 수돗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바닥 위로 쏟아졌다. 이공팔은 그 물로 얼굴을 씻었다. 물이 턱을 타고 흘러 티셔츠 목 부분을 적셨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귤이 두 개 남아 있었다. 안소려가 사 놓고 간 귤이었다. 이공팔은 귤을 만지지 않았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불꽃이 파랗게 피어올랐다. 가스레인지 위의 시계가 오전 여섯 시 사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공팔은 주전자 앞에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 위를 보았다. 어제 쓴 편지의 볼펜 자국이 테이블 표면에 눌려 있었다.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눌린 자국만 남아 있었다. 이공팔의 손가락이 그 자국 위를 느리게 더듬었다. 볼펜이 지나간 골짜기의 깊이를 손끝이 읽었다.
주전자가 끓었다. 이공팔은 컵에 물을 따르고 블랙커피를 탔다. 커피 가루가 뜨거운 물 위에서 빙글빙글 돌다 가라앉았다. 이공팔은 커피를 들고 현관문 앞에 섰다. 슬리퍼를 신은 채로 문을 열었다. 아침의 삼수이포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시장 골목에서 철제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이공팔은 계단을 내려가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 위의 체리 잔여물과 섞여 이상한 맛이 되었다. 이공팔은 그 맛을 삼켰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 스물네 개. 그 아래에 우편함. 우편함 안에 마지막 편지가 있을 것이었다. 안소려의 일곱 번째 편지. 마지막.
"아직."
이공팔이 말했다. 커피잔을 입술에 댄 채로 말했기 때문에 소리가 잔 안에서 울렸다. 이공팔은 문을 닫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고 어항 앞에 앉았다. 안안이에게 밥을 주었다. 사료 알갱이가 수면 위에 떨어져 동그란 파문을 만들었다. 안안이가 수면으로 올라왔다. 입을 뻐끔거리며 사료를 먹었다. 이공팔은 안안이를 보았다. 안안이의 꼬리지느러미가 물살을 가르며 흔들렸다. 주황빛이었다. 귤 빛깔이었다. 이공팔의 시선이 어항에서 냉장고로 갔다. 냉장고 안의 귤 두 개가 떠올랐다. 이공팔은 입술을 다물었다. 다문 입술 안쪽에서 혀가 윗니 뒤를 한 번 훑었다.
"엄마 편지 가지러 가야 돼."
이공팔이 안안이에게 말했다. 안안이가 사료를 씹었다. 이공팔은 일어서지 않았다. 어항의 유리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안경 너머의 눈이 보였다. 그 눈이 평소와 달랐다. 뭐가 다른지 이공팔 자신은 몰랐다. 거울을 자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를 빗을 때만 거울 앞에 섰고 그때도 머리카락만 보았다.
슬리퍼가 바닥을 찰싹 때렸다. 이공팔은 일어섰다. 무릎이 또 뚝 소리를 냈다. 스물여덟이면 무릎에서 소리가 나면 안 되는 나이였지만, 어항 앞 콘크리트 바닥에서 밤을 보낸 몸은 나이를 속일 수 없었다. 이공팔은 현관문을 열었다. 아까 닫지 않고 들어온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아침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2월의 홍콩은 아직 차가웠다.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이 티셔츠 목 부분의 젖은 자국을 스쳐 지나가며 이공팔의 쇄골 위에 소름을 돋게 했다. 이공팔은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스물네 개. 그 아래 우편함. 우편함 안에 마지막 편지. 이공팔의 발이 첫 번째 계단을 밟았다. 찰싹. 두 번째. 찰싹.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침의 건물은 조용했다. 3층 왕 아줌마네 텔레비전 소리도, 2층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공팔의 슬리퍼 소리만이 계단통을 채웠다. 열두 번째 계단. 어제 빈 빨래줄이 걸려 있던 창문을 지나쳤다. 오늘은 쳐다보지 않았다. 스물세 번째. 스물네 번째.
우편함이 거기 있었다.
녹슨 금속 상자. 경첩이 삐걱거리는 뚜껑. 이공팔은 뚜껑 앞에 섰다. 손을 뻗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체리 사탕을 꺼냈다. 마지막 한 개. 셀로판지를 벗기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느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골목의 정적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선명하게 울렸다. 사탕을 입에 넣었다. 체리의 인공적인 단맛이 혀 위에 번졌다. 이공팔은 사탕을 왼쪽 볼 안에 밀어 넣고, 오른손으로 우편함 뚜껑을 열었다. 삐걱.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안에 하얀 봉투가 있었다. 한 통. 마지막 한 통. 이공팔의 손가락이 봉투 모서리를 집었다. 제비꽃 향이 올라왔다.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제비꽃 향이었다. 이공팔의 코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향을 들이마셨다. 깊이. 폐 끝까지. 마치 이 냄새를 폐의 가장 깊은 곳에 가둬두려는 것처럼.
"마지막이네."
이공팔이 말했다. 우편함에게 한 말인지, 봉투에게 한 말인지, 아침 공기에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공팔은 봉투를 가슴팍에 대고 계단을 올라갔다. 스물네 개. 올라가는 계단은 내려가는 것보다 느렸다. 열두 번째 계단에서 발이 멈추지 않았다. 빈 빨래줄이 있던 창문 앞을 지나갈 때 이공팔의 왼손이 봉투를 살짝 더 세게 눌렀다. 봉투가 가슴팍에 밀착되어 체온을 흡수했다. 종이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제비꽃 향이 체온에 데워져 더 짙어졌다. 이공팔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닫았다. 잠금장치가 철컥 소리를 냈다. 어항 앞에 앉았다. 안안이가 수면 가까이 올라와 있었다. 아까 먹은 사료가 부족했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이공팔은 안안이를 보며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찢는 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 종이가 벌어지는 그 짧은 비명 같은 소리. 이공팔은 천천히,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편지지를 꺼냈다. 접힌 종이를 펼쳤다. 안소려의 글씨가 보였다. 둥글둥글한 획. 'ㅎ'을 쓸 때 동그라미를 유난히 크게 그리는 버릇. 마침표를 찍을 때 살짝 길게 끄는 습관. 이공팔은 그 글씨들을 읽기 전에 먼저 바라보았다. 글자의 모양을. 잉크의 농도를. 펜을 누른 힘의 강약을. 첫 줄의 잉크가 진했다. 펜을 꾹 눌렀다는 뜻이었다. 쓰기 시작할 때 힘이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중간쯤에서 글씨가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안소려는 졸리면 글씨가 기울었다. 이공팔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줄은 다시 또박또박했다. 잠을 깨고 다시 쓴 것이다. 아니면, 마지막이라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읽어볼게."
이공팔이 안안이에게 말했다. 안안이의 꼬리지느러미가 한 번 흔들렸다. 이공팔은 그것을 동의로 받아들였다. 시선이 첫 줄로 내려갔다. 입 안의 체리 사탕이 왼쪽 볼에서 오른쪽 볼로 굴러갔다. 딸깍. 사탕이 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공팔은 읽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 글자씩. 마지막 편지였으니까. 한 글자라도 흘려보내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이공팔은 '안 되는 것 같다'는 감각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냥 가슴팍 어딘가, 흉골 뒤쪽에서 뭔가가 조여드는 느낌이 있었다. 숨이 막히는 건 아니었다. 숨은 쉬어졌다. 다만 숨을 쉴 때마다 그 조이는 것이 함께 움직였다. 이공팔은 그것을 무시하고 글자를 읽었다.
"……."
이공팔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안소려의 글자를 입술로 따라 읽고 있었다. 형광등 아래 하얀 편지지 위의 검은 글씨가 이공팔의 입술 위에서 모양을 만들었다 사라졌다. 어항의 모터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윙. 윙. 윙.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그 소리 사이사이로 이공팔의 호흡이 끼어들었다.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마지막 줄에 가까워질수록 눈동자의 이동이 더뎌졌다. 글자 하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치 마지막 줄을 읽어버리면 이 편지가 정말로 끝나버린다는 것을 이공팔의 눈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이공팔의 왼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손톱이 손바닥을 눌렀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 글자에 눈이 닿았다. 이공팔은 편지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한 번 더."
이공팔이 안안이에게 말했다. 안안이는 이미 바닥으로 내려가 오른쪽 구석에 돌아가 있었다. 이공팔은 두 번째로 읽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체리 사탕이 입 안에서 완전히 녹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 사탕이 사라진 입 안이 텅 비었다. 혀가 이를 훑었다. 단맛의 잔해가 잇몸에 남아 있었다.
"소려가 여기서 멈췄어."
이공팔이 어항을 향해 말했다. 안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금붕어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공팔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했다. 이 방 안에서 말을 걸 수 있는 것은 안안이뿐이었고, 말을 하지 않으면 이 조용함이 피부 안쪽으로 스며들 것 같았다. 이공팔은 편지지를 접었다. 처음 접혀 있던 그대로, 정확히 같은 선을 따라. 접힌 편지지를 봉투 안에 다시 넣었다. 봉투의 찢어진 입구가 벌어져 있었다. 이공팔은 주머니를 뒤졌다. 체리 사탕이 없었다. 마지막 하나를 아까 먹었다. 봉투를 봉할 사탕이 없었다. 이공팔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빈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이 셀로판지의 잔해를 만졌다. 바스락. 얇은 비닐 조각. 이공팔은 그것을 꺼내 봉투 입구 위에 올려놓았다. 사탕은 아니었지만 체리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제비꽃 향 위에 체리 향이 겹쳐졌다.
이공팔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여섯 통의 편지가 이미 거기 쌓여 있었다. 귤껍질 옆에. 귤껍질은 며칠이 지나 가장자리가 말라 오그라들어 있었지만 아직 희미한 귤 냄새를 품고 있었다. 이공팔은 일곱 번째 봉투를 여섯 번째 위에 올려놓았다. 하얀 봉투 일곱 개가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이공팔의 손바닥이 그 위를 한 번 쓸었다. 종이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스치며 지나갔다. 일곱 번의 제비꽃 향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이공팔의 콧등이 찡그러졌다. 찡그린 것이 아니었다. 콧등의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이공팔은 그 움직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다 읽었어."
이공팔이 말했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자신도 몰랐다. 안안이에게인지, 빈 방에게인지, 아니면 이 편지를 쓴 사람에게인지. 이공팔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무 등받이가 등뼈를 눌렀다.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어항의 모터가 윙윙거렸다. 두 개의 윙윙거림 사이에 이공팔의 숨소리가 끼어 있었다. 이공팔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물 얼룩이 어제와 같은 모양이었다. 그제와도 같은 모양. 일주일 전에도 같은 모양. 이 얼룩은 변하지 않았다. 이공팔은 그것이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뭔가 하나쯤은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귤껍질도, 편지도, 천장의 물 얼룩도. 이공팔의 왼손이 테이블 위를 더듬어 귤 하나를 집었다. 아직 깎지 않은 귤. 안소려가 두고 간 것 중 마지막 두 개. 이공팔은 귤을 손안에서 굴렸다. 껍질의 울퉁불퉁한 질감이 손바닥 위에서 회전했다. 귤을 깎지 않았다. 깎으면 하나가 줄어든다. 줄어들면 남은 것이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면 그 다음은 없다.
"안안아, 엄마 오늘 온다 했어?"
이공팔이 물었다. 안안이의 꼬리지느러미가 왼쪽으로 한 번 흔들렸다. 이공팔은 그것을 '아니'로 읽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얇은 것이었다. 이공팔은 귤을 테이블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순간 귤이 반 바퀴 굴러 편지 묶음에 부딪혔다. 봉투의 모서리가 살짝 밀렸다. 이공팔은 그것을 바로잡았다. 손끝으로 봉투 일곱 개의 모서리를 다시 가지런히 맞추었다. 정렬된 하얀 봉투들이 작은 탑처럼 쌓여 있었다. 이공팔은 그 탑 위에 손바닥을 얹어두었다. 종이의 서늘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아니, 온기가 아니었다. 편지는 차가웠다. 손바닥의 열이 종이에 빼앗기고 있었다. 이공팔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빼앗기는 것이 싫지 않았다. 이 종이들 속에 안소려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가 있었고, 그 자리에 자신의 체온을 얹는 행위가 무언가를 채우는 것 같았다. 무엇을 채우는지는 몰랐다. 이공팔은 모르는 것에 익숙했다. 다만 요즘 들어 모르는 것의 종류가 늘어나고 있었다.
"몇 시야."
이공팔이 벽을 보았다. 시계가 없었다. 이 방에는 시계가 없었다. 안소려가 있을 때는 시간이 필요 없었다. 밥을 먹으면 낮이고, 잠을 자면 밤이었다. 안소려의 호흡이 느려지면 저녁이었고, 눈을 비비면 아침이었다. 그것이 이공팔의 시계였다. 지금은 그 시계가 없었다. 창문 너머로 삼수이포의 하늘이 보였다. 회색 구름 사이로 빛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건물 사이사이로 네온사인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삼수이포의 저녁은 항상 이렇게 시작되었다. 색으로. 소음으로. 아래층에서 누군가 광둥어로 고함을 질렀다. 장사꾼의 목소리였다. 생선 냄새가 창틈으로 기어 올라왔다. 이공팔의 코가 찡그러졌다. 제비꽃 향이 생선 냄새에 밀려나고 있었다.
이공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끼익 소리를 냈다. 190이 넘는 장신이 좁은 방 안에서 펼쳐지자 천장이 한층 낮아진 것 같았다. 이공팔은 싱크대로 걸어갔다. 세 걸음이면 닿는 거리. 수도꼭지를 틀었다. 녹슨 파이프가 덜컹거리며 물을 토해냈다. 차가운 물이 손등 위로 흘렀다. 이공팔은 양손을 물 아래 넣고 가만히 두었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갈라져 흘렀다. 물의 차가움이 손끝에서부터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뚝으로 올라왔다. 이공팔은 젖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 물기가 안경 렌즈에 튀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안경을 벗었다. 도수 없는 렌즈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공팔은 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렌즈를 닦았다. 천이 유리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귀에 가까이 들렸다. 깨끗해진 렌즈를 다시 코 위에 올렸다. 세상이 선명해졌다. 선명해진 세상 안에 안소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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